KBL 코트 위에 새로운 에너지가 흐르고 있다.
덩크 후 주먹을 불끈 쥐며 관중석을 향해 소리치는 선수들, 팀메이트와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환하게 웃는 모습들.
이들의 플레이에는 어딘가 자유분방하고 열정적인 무언가가 있다.
단 3년 전만 해도 KBL에서 볼 수 없었던 스타일이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7,000개 섬으로 이루어진 열대의 나라, 필리핀 출신 선수들이 있다.

2022년, 대구 한국가스공사가 SJ 벨란겔(SJ Belangel) 을 영입하며 연 아시아쿼터의 문은 이제 하나의 흐름이 되었다.
놀랍게도 현재 KBL 10개 구단 모두가 필리핀 선수를 1명 이상 보유하고 있으며, 일부 구단은 아예 필리핀 전담 스카우터를 상주시키고 있다.
이 흐름은 단순한 트렌드가 아니라, KBL의 새로운 정체성이다. 코트 위의 ‘필리핀 르네상스’가 시작된 것이다.
왜 하필 필리핀? 완벽한 타이밍이 만든 케미스트리
아시아쿼터 제도의 역사를 돌아보면, 처음엔 일본이 주인공이었다.
2020년 도입 당시 일본 선수만을 대상으로 했지만, 기대만큼의 파급력은 없었다.
이유는 명확했다.
일본 B리그는 이미 자국 내 연봉 수준이 KBL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높았고, 카와무라 유키처럼 NBA 드래프트까지 도전하는 유망주들을 배출하는 강국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굳이 한국행을 택할 매력이 부족했던 셈이다.
하지만 2022년 필리핀으로 아시아쿼터제가 확대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아시아쿼터의 핵심 매력은 “외국인 선수 슬롯을 차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구단 입장에서는 기존 외국인 2인 외에 추가로 필리핀 선수를 기용할 수 있으면서도, 연봉 부담은 상대적으로 적다.
PBA(필리핀 프로농구리그)의 연봉 상한이 연 1억 원 수준으로 제한되어 있어, KBL에서 제시하는 1억~1.5억 원은 그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더 중요한 건 필리핀의 농구 DNA다.
이 나라에서 농구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일상 그 자체다.
골목마다 농구대가 있고, 아이들은 걷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드리블을 배운다.
국제농구연맹(FIBA) 아시아 랭킹에서도 한국보다 상위권에 있으며, 선수층의 두께는 상상을 초월한다.
여기에 영어라는 글로벌 언어까지 더해져, 구단 입장에서는 통역 부담 없이 즉시 팀워크가 가능하다는 실용적 장점까지 얻었다.
현재 아시아쿼터 제도는 일본, 필리핀을 포함해 대만, 인도네시아, 태국, 몽골, 인도 등 7개국으로 확대되었지만, 필리핀 선수들의 독보적 활약은 우연이 아니다.
기량, 시장성, 경제성, 문화 적응력까지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결과다.
게임 체인저들이 말하는 KBL
이선 알바노(Ethan Alvano,DB)는 KBL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쿼터 MVP 수상자다.
평균 어시스트 3위, 득점 13위라는 화려한 스탯 뒤에는 그만의 철학이 있다.
“KBL의 가장 큰 매력은 체계적인 시스템이에요. 필리핀에서는 개인의 플래시한 플레이가 중심이지만, 한국에 와서 농구의 새로운 구조를 배웠죠. 이게 진짜 농구구나 싶었어요.”
렌즈 아반도(Rhenz Abando,정관장)는 폭발적인 점프력과 슬래셔 스타일로 데뷔전부터 한국 팬들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KBL은 정말 터프한 리그”다.
“필리핀 팬들이 직접 비행기를 타고 저를 보러 오는 걸 볼 때마다, 더 잘해야겠다는 책임감을 느껴요. 그들의 기대를 배신할 수 없거든요.”

KBL 1호 필리핀 선수인 SJ 벨란겔의 증언은 더욱 흥미롭다.
“한국 농구는 정말 팀 중심의 시스템 플레이가 인상적이었어요. 하지만 그보다 더 놀란 건 문화적인 부분이었죠. 한국 사람들이 정말 친절하고, 팬들도 따뜻해요. 경기 중 파울을 당해도 상대 선수가 먼저 와서 사과하는 모습을 보며, 이게 진짜 스포츠맨십이구나 깨달았어요.”
칼 타마요(Carl Tamayo, LG)는 마닐라 대학 시절부터 ‘필리핀 농구의 미래’로 불린 천재다.
그의 KBL 적응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케빈 켐바오(Kevin Quiambao,소노), JD 카굴란간(JD Cagulangan, KT) 등도 필리핀 국가대표급 자원들로, 이들의 존재만으로도 KBL의 위상이 한 단계 올라갔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과 필리핀, 완벽한 윈-윈
KBL이 필리핀에서 찾은 건 단순한 전력 보강 이상이었다.
가성비 좋은 선수 영입, 플레이 스타일의 다양성 확보, 그리고 동남아시아 마케팅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은 셈이다.
특히 필리핀의 강력한 농구 팬덤과 유튜브 문화는 KBL 경기가 SNS에서 바이럴되는 핵심 동력이 되고 있다.
KBL이 필리핀 전용 유튜브 채널과 SNS 계정을 별도로 운영하며 글로벌 노출을 확장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필리핀 선수들에게 KBL은 단순한 해외 리그가 아니다.
더 나은 수입은 물론이고, 체계적인 코칭 시스템과 글로벌 노출을 통해 개인의 성장과 자국 농구 발전에 동시에 기여할 수 있는 플랫폼이다.
벨란겔의 말처럼 “KBL에서의 경험이 나를 더욱 완성된 선수로 만들어줬다”는 것이다.

물론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국내 선수들의 기회가 줄어드는 것 아니냐는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지금의 흐름은 분명히 ‘농구의 다양성과 국제화’라는 거대한 물결 안에 있다.
필리핀 선수들의 활약은 단순한 용병 영입을 넘어, KBL이 아시아 농구의 허브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제 KBL 코트에서 필리핀 억양의 영어를 듣는 것은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코트 위의 언어와 리듬을 바꿔놓았다.
그리고 그 변화는 팬들에게 더 풍부하고 예측 불가능한 농구의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글로벌 스포츠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국경을 넘나드는 재능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경쟁의 하모니 말이다.